대법원 1992. 7. 24. 선고 92도1148 판결

대법원 1992. 7. 24. 선고 92도1148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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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방조,국가보안법위반]

판시사항

가.

형법 제252조 제2항의 자살방조죄의 구성요건 및 그 방법

나. 분신자살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그 실행을 용이하게 도와주겠다는 의도로 1991.4.27.경부터 같은 해 5.8.까지의 어느 날에서 울 어느 곳에서 유서 2장을 작성하여 줌으로써 유서내용에 의하여 암시하는 방법으로 분신자살의 실행을 용이하게 도와주어 자살을 방조하였다는 공소사실은 자살방조죄의 공소장 기재로서 적법하다고 한 사례

다. 공소사실에 일시와 장소로서 “1991.4.27.경부터 같은 해 5.8.까지의 어느 날 서울 어느 곳에서”로 되어 있고, 유서 작성의 방법에 관하여 구체적인 기재가 없다 하더라도, 위 공소사실은 특정되어 있다고 봄이 상당하고, 위 기재만으로는 현장부재 등의 증명 또는 방어권 행사에 장애를 초래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한 사례

라. 분신자살한 경위, 증거물인 수첩, 업무일지, 메모지 등이 피고인에 의하여 사후에 조작되었다는 점, 분신자살 전후에 나타난 피고인의 행적 및 진술 등에 비추어 피고인은 망인이 자살하려는 정을 알고 그 유서를 대필해 주었으며 그 후 그 사실을 은폐하려 한 것이라고 보아 자살방조의 범죄사실을 인정한 사례

마. 북한이 대한민국과 함께 국제련합에 동시 가입하였고 그 사이에 ‘화해와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 발효되었으므로 국가보안법이 그 규범력을 상실하였다고 할 수 있는지 여부(소극)

판결요지

가.

형법 제252조 제2항의 자살방조죄는 자살하려는 사람의 자살행위를 도와주어 용이하게 실행하도록 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으로서, 그 방법에는 자살도구인 총, 칼 등을 빌려주거나 독약을 만들어 주거나, 조언 또는 격려를 한다거나 기타 적극적, 소극적, 물질적, 정신적 방법이 모두 포함된다.

나. 공소사실은, 피고인은 망인이 공소장에 기재된 상황에서 분신자살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고 그 실행을 용이하게 도와주겠다는 의도로 1991.4.27.경부터 같은 해 5.8.까지의 어느 날에 서울 어느 곳에서 리포트 용지에 검은 색 사인펜으로 유서 2장을 작성하여 줌으로써 유서내용에 의하여 위 망인에게 그의 분신자살이 조국과 민족을 위한 행위로 미화될 것이며 사후의 장례의식을 포함한 모든 문제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서 책임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방법으로 분신자살의 실행을 용이하게 도와주어 망인의 자살을 방조하였다는 내용이므로, 이는 결국 적극적, 정신적 방법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자살의 동인과 명분을 주어 자살을 용이하게 실행하도록 하였다는 것으로서 자살방조죄에 해당되는 공소임이 명백하여 공소장에 자살방조죄가 될 만한 사실이 포함되지 아니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고 한 사례.

다. 공소사실에 일시와 장소로서 “1991.4.27.경부터 같은 해 5.8.까지의 어느 날 서울 어느 곳에서”로 되어 있고, 유서 작성의 방법에 관하여 구체적인 기재가 없다 하더라도, 유서 대필 여부가 문제로 되는 한 이는 자살자와 유서대필자 사이에 일어난 일이어서, 결국 그 유서가 대필되었는지 여부가 그 범죄성립의 핵심을 이루는바, 이처럼 자살이 이미 실행되어 버렸고 그 유서가 압수되어 특정되어 있는 경우, 그 일시와 장소는 범죄의 동일성 인정과 이중기소 방지, 시효저촉 여부, 토지관할을 가름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 유서대필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도로만 기재되어 있으면 충분하므로, 위 공소사실은 특정되어 있다고 봄이 상당하고, 따라서 위와 같은 정도의 기재만으로는 현장부재 등의 증명 또는 방어권 행사에 장애를 초래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한 사례.

라. 망인의 분신자살경위, 증거물인 수첩, 업무일지, 메모지 등이 피고인에 의하여 사후에 조작되었다는 점, 망인의 분신자살 전후에 나타난 피고인의 행적 및 진술 등에 비추어 피고인은 망인이 자살하려는 정을 알고 그 유서를 대필해 주었으며 그 후 그 사실을 은폐하려 한 것이라고 보아 자살방조의 범죄사실을 인정한 사례.

마. 피고인이 가입한 ‘혁명의 불꽃’이라는 단체는, 현정부를 ‘미, 일 제국주의 자본의 강도적 약탈과 소수 독점재벌의 무한한 이윤을 보장하기 위한 제국주의 무리와 독점자본가놈들의 민중에 대한 파쇼적 억압과 착취의 도구’로서, 제반 ‘파쇼적 악법’과 ‘권력기구’ ‘수탈적인 조세제도’등을 통하여 민중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고 있어 타도하여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의회주의적 방식, 점진적 교체의 방식으로는 그 타도가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그 타도의 방법론으로서 노동자, 농민, 도시 소자산가 등 모든 민중이 단결하여 무장봉기에 의한 임시혁명정부의 구성을 제시하면서 군대 및 경찰의 해체와 혁명군 창설, 자본 몰수와 국유화를 통한 민중적 민족경제의 수립 등을 이루어 공산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 민중공화국을 수립하고 북한과 연방제 통일을 이루려는 것을 조직강령으로 하고 있고, 피고인이 소지한 유인물 등은 그러한 민중혁명을 명시적 묵시적으로 선전, 선동하는 내용이므로, 이는 헌법이 전혀 상정하지 아니하는 혁명적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하여 헌법체계와 양립할 수 없는 공산주의 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 것이어서, 비록 북한이 대한민국과 함께 국제연합에 동시 가입하였다거나 그 사이에 ‘화해와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 발효되었다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이 그 규범력을 상실하였다고 할 수 없을 뿐더러, 그 공범들에 대한 형사 제재가 이미 종료되었다 하여 그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이상 피고인에 대한 공소제기가 부당하다고 볼 수 없으니, 결국 피고인의 위와 같은 행위에 가벌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상 고 인

피고인

변 호 인

변호사 김창국 외 3인

원심판결

서울고등법원 1992.4.20. 선고 92노401 판결

주 문

상고를 기각한다.

상고후의 구금일수 중 43일을 징역형에 산입한다.

이 유

1.피고인의 변호인들의 상고이유 제1점에 대하여

원심이, (1) 형법 제252조 제2항의 자살방조죄는 자살하려는 사람의 자살행위를 도와 주어 용이하게 실행하도록 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으로서, 그 방법에는 자살도구인 총, 칼등을 빌려주거나 독약을 만들어 주거나, 조언 또는 격려를 한다거나 기타 적극적, 소극적, 물질적, 정신적 방법이 모두 포함되는바, 이 사건 자살방조죄에 관한 공소사실은, 피고인은 김기설이 공소장에 기재된 상황에서 분신자살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고 그 실행을 용이하게 도와주겠다는 의도로 1991. 4. 27.경부터 같은 해 5. 8.까지의 어느 날에 서울 어느 곳에서 리포트 용지에 검은 색 사인펜으로 공소장에 기재된 내용의 유서 2장을 작성하여 줌으로써 그 유서내용에 의하여 위김기설에게 그의 분신자살이 조국과 민족을 위한 행위로 미화될 것이며 사후의 장례의식을 포함한 모든 문제도 서준식, 김선택 등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약칭전민련 ; 이하 전민련이라고 한다)에서 책임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방법으로 분신자살의 실행을 용이하게 도와주어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하였다는 내용이므로, 이는 결국 적극적, 정신적 방법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자살의 동인과 명분을 주어 자살을 용이하게 실행하도록 하였다는 것으로서 자살방조죄에 해당되는 공소임이 명백하여 공소장에 자살방조죄가 될 만한 사실이 포함되지 아니하였다고는 볼 수 없고, (2) 또한 그 공소사실에 일시와 장소로서 ‘1991.4. 27.경부터 같은 해 5. 8.까지의 어느 날 서울 어느 곳에서’로 되어 있고, 유서 작성의 방법에 관하여 구체적인 기재가 없다 하더라도, 유서 대필 여부가 문제로 되는 한 이는 자살자와 유서 대필자 사이에 일어난 일이어서, 결국 그 유서가 대필되었는지 여부가 그 범죄성립의 핵심을 이루는바, 이 사건과 같이 자살이 이미 실행되어 버렸고 그 유서가 압수되어 특정되어 있는 경우, 그 일시와 장소는 범죄의 동일성 인정과 이중기소 방지, 시효저촉 여부, 토지관할을 가름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 유서대필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도로만 기재되어 있으면 충분하므로, 이 점에서 위 공소사실은 특정되어 있다고 봄이 상당하고, 따라서 위와 같은 정도의 기재만으로는 현장부재 등의 증명 또는 방어권 행사에 장애를 초래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고 판단한 데에, 소론과 같은 위법은 없으므로 논지들은 모두 이유 없다.

2.  피고인의 상고이유 제1점

가. 그 변호인들의 상고이유 제2점에 대하여 원심이 그 설시 증거들로 인정한 사실 및 판단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공소외 1의 분신자살 경위에 대하여

공소외 1은 1965. 11. 27.생으로서 6세 무렵에 생모를 여읜 채 아버지와 계모밑에서 성장하였고, 경기 파주군 광탄상고 1학년때 상경하여 큰 누나 공소외 2집에서 그 부부와 함께 살면서 한때 대학입학시험자격 검정고시 준비를 하다가 1985. 12.경부터 1988. 6.경까지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뒤 1989년부터성남민주화청년연합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90. 12.말부터는 전민련에 가입하여 활동해 오면서 1991. 4. 26. 이른바 ‘강경대군 치사사건’이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시위 열기가 고조되고 재야운동권인사들이 범국민대책회의를 결성하면서 전민련도 그 대책회의에 참가하게 되자 전민련 파견자로서 위 대책회의본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연세대학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사실, 공소외 1은 처음 전민련 총무국에 근무할 때 실제와는 다르게 학력을 속여 한양대학교 3학년 중퇴자로 행세하였고 이미 그 전부터 전민련 총무국에 근무하던 피고인과 일상접촉을 통해 친하게 되자 1991. 1. 20. 피고인과 그 애인 공소외 3의 소개로 공소외 3의 대학동창생인 공소외 4를 소개받아 동인과 교제하게 되었는바, 공소외 1은 동인에게도 한양대학교 3학년 중퇴자로 행세한 사실, 그 후 공소외 1은 공소외 4와 주 1,2회 가량 만나 교제하였고 같은 해 3.17. 춘천 청평사에 놀러갔다가 공소외 4에게 청혼을 하였고 (그달 말경에는 중학교 동창생 조원혁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자랑을 하였으며, 같은 해 4. 중순경에는 둘째 누나 공소외 5에게 결혼하게 될 것 같다는 말까지 하여, 누나들이 결혼하면 방을 얻어 주어야겠다고 상의하기도 하였다), 공소외 4도 위 청혼에 대해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같은 해 4.말에서 5.초에 이르러서는 공소외 1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 사실, 한편 공소외 1은 박경민으로부터 한국방송통신대생 몇명의 모임인 ‘소리새벽’의 진로를 지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같은 해 5. 5.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박경민, 송국영, 이지혜 등 회원들과 첫모임을 갖고 자기 소개와 모임의 진로 등을 논의하였는데, 공소외 1은 위 모임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있는 셈이고 그 회원들보다 대체로 6, 7세 정도 나이가 많은 사회인인데도, 모임 도중에 위 모임의 성격이나 체신에 걸맞지 않게 두 차례나 술을 사오게 하여 낮부터 술을 많이 마셨는가 하면, 모임이 끝난 후에도 회원들과 식당과 술집을 옮겨 다니며 대취하도록 술을 마시다가, 끝내는 여자들인 이지혜, 송국영과 함께 술을 사들고 백제여관에 들어가 그곳에서도 술을 마시게 되었는바, 그곳에서 술에 만취하여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신변잡담을 하고 주먹으로 방바닥을 치고 울기까지 하면서 “5. 8.에 자살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 못하겠고 처음하는 말이다.”고 5. 8.에 자살하려는 결심을 토로하였고, 그때 “왜 우리에게 얘기 하느냐. 의문이 난다.”고 물어보는 송국영의 뺨을 때리기까지 하면서 “개새끼들” “죽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는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하였으며, 5. 6. 오후까지 함께 있으면서 자살을 만류하는 이지혜에게 다시 5. 8. 자살할 계획임을 확인해 준 사실, 또한 공소외 1은 이틀 후 19:30경에는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 있는 카페에서 공소외 4를 만나 “분신한 사람들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분신한 사람들은 어떠하였을 것 같은가”라는 등 심각한 말을 하여, 공소외 4는 전날과 그날 공소외 1과 두 차례 전화할 때에도 “당분간 못 만날 것 같다. 잘 살아라”는 등의 말을 들은 바 있고 그때는 이른바 ‘강경대군 치사사건’으로 분신자살이 잇따르던 상황이어서 공소외 1이 자살하려는 것으로 눈치채고 울면서 “우리는 왜 이제까지 만났느냐.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된단 말이냐”고 애원반 항의반 자살하려는 결심을 돌리도록 노력하였으나, 공소외 1은 끝내 그날 22:30경 공소외 4를 아현 전철역 플랫홈에 밀어넣다시피 들여 보낸 뒤 공소외 4와 헤어져 버린 사실, 또한 이지혜와 박경민 등이 전민련측에 알리고 전민련을 통하여, 공소외 1이 위와 같이 이지혜, 송국영에게 같은 해 5. 8. 자살할 계획임을 토로한 사실을 알게된 임근재는 5. 7. 22:00경 그 자취방에 가서 기다리다가 그 자취방으로 들어오는 공소외 1을 만나 부근 포장마차로 데려가 술을 마셨고, 임근재의 전화를 받고 그곳에 온 전민련 관계자 이보은(여)과 함께 그곳에서 대학로까지 가서 함께 지냈는데, 공소외 1은 5. 8. 05:30경 전화를 걸겠다고 간 뒤 잠적하였고, 그날 06:30경 공소외 4에게 신촌 이대 부근이라고 하면서 “열심히 살아라. 사랑한다”는 내용의 전화를 한뒤 신나 두 통을 신문지에 싸들고 서강대학교 본관5층 옥상에 올라가 그날 08:07경 신나를 몸에 뿌리고 라이타 불을 붙인 뒤 약16미터 아래 땅바닥에 떨어져 분신자살 하였고, 그때 이 사건 유서 2장이 위 옥상에 벗어 놓은 상의에 넣어져 있는 채 발견된 사실, 이 사건 유서 2장 중 부모에 대한 유서에는, 공소외 1이 감수성이 예민한 고교 1학년 중퇴 후부터 의지해 왔고 특히 자살 7개월 전 금 2,700,000원을 몰래 가지고 나와 당연히 인간적인 고뇌를 느꼈을 큰 누나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이 없고, 특히 어버이날을 골라 부모에게 인륜상 차마 하여서는 안될, 건전한 일반인이 가장 불효라고 보는 자살을 하면서 오히려 그동안 하지 못한 효도를 마지막으로 하려한다고 하고, 자살 후의 처리를 부모나 가족이 아닌 제3자에게 위임하라고 하면서 부모에게는 말미에 공소외 1이라고 이름만을 기재하고 다른 존칭을 쓰지않은 데 반하여 그 제3자에게는 ‘제 목숨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선배님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는 공소외 1 본인이 쓴 마지막 유서라고 볼 수 없는 사정 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소외 1은 이지혜 등을 만난 1991. 5. 5.전에 이미 자살을 계획하였고, 5. 5. 이지혜 등을 만났을 때 내심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만취하도록 마신 뒤 그들에게 5. 8. 자살할 계획을 털어 놓은 것이지 그날 즉흥적으로 자살하려 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굳이 5. 8. 자살을 고집할 사정이 없는데도 결혼까지 염두에 둔 여자의 간절한 만류까지 끝내 뿌리치고 이지혜 등에게 공언한 대로 5. 8. 쫓기듯이 분신자살한 점에 비추어 볼때, 이는 일반인의 사회통념을 뛰어 넘은 자살로서 그 자체로도 다른 사람과의 관련에서 자살하려 한 것임을 쉽사리 추정할 수 있다.

(2) 이 사건 수첩의 조작 여부에 대하여

공소외 1이 분신자살한 날 공소외 1의 유해가 안치된 연세대학교 부속병원 영안실에서 공소외 1의 둘째, 셋째 누나들이 이 사건 유서가 공소외 1의 필적이 아닌것 같다는 의문을 제기하고, 1991. 5. 10.에는 공소외 1의 셋째 자형인 공소외 6이 가족들의 뜻에 따라 이 사건 유서 글씨가 공소외 1의 것이 아니니 그 사망경위를 조사해 달라고 검찰에 요청하면서 공소외 1의 필적이 있는 책표지 2장 (검사가 제출한 증 제3-1호)을 제출하였고, 이에 따라 검찰은 그 날 공소외 1이 소속되었던 전민련 관계자에게 공소외 1의 평소 필적자료를 요구하여 전민련 측에서 같은 달 11. 공소외 1이 기재하던 일지라고 하면서 업무일지 (검사가 제출한 증 제5-1호)를 제출하였으며, 그후 검찰은 같은 달 16. 공소외 4가공소외 1의 분신자살 전날 그로부터 동인의 수첩을 받아서 가지고 있다가 그 다음 날 전민련측에 교부한 사실을 알게 되어 전민련 관계자에게 그 수첩의 제출을 요구하였던바, 전민련 측에서는 같은 달 20. 그 수첩이라면서 이 사건 수첩을 검찰에 제출하였음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 사건 수첩이 바로 공소외 1이 공소외 4에게 주고 공소외 4가 전민련에 전달한 그 수첩인지를 살피건대, 이 사건 수첩의 본체와 글씨가 써 있는 전화번호 기재용지 3장의 각 절취선이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이 전화번호 기재용지 3장은 원래부터 이 사건 수첩에 붙어 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수첩에 붙어 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점, 전화번호 기재용지 3장의 연필로 기재되어있는 문자 밑에 강한 필압형태가 나타나 있으나 그 뒷장에 나타나 있어야 할 필압흔적이 필흔재생기에 의하여도 관찰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위 수첩을 공소외 1로부터 교부받았다가 전민련에 제출한 공소외 4의 진술에 의하면 전화번호기재용지 등에 기재된 글자의 필기구와 색깔이 원래와 다른 사실이 인정되는 점, 위 전화번호 기재용지에 적혀 있는 안혜정은 공소외 1의 광탄중학교 동창생으로서 서로 절친하게 지내왔고, 공소외 1은 1991. 4. 초순경까지 안혜정이 근무하던 서울 서부경찰서 수사과로 수시로 전화를 하곤 하였으며, 그 전화번호는 ‘386-3766’인데도 위 전화번호 기재용지의 안혜정란에는 이와 다르게 ‘386-2776’으로 기재되어 있는 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김형영이 작성한 1991.5.25.자 및 5.29.자 각 감정서의 기재에 의하여 이 사건 수첩의 필적이 공소외 1의 것이 아니고 피고인의 것임을 알 수 있는 점들을 종합하면, 이 사건 수첩은 원래 공소외 1이 남긴 수첩 그대로가 아니고 공소외 1의 분신자살 후 피고인에 의하여 조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3) 업무일지의 조작 여부에 대하여

전민련이 제출한 업무일지 (위 증 제5-1호)는 표지를 제외한 3장으로서, 1991. 3. 20.부터 같은 해 4. 15.까지 그 행사 내용 등이 적혀 있는바, 그 첫 장에는 3. 20.자 행사 내용만 기재되어 있는 채 그 아래부분이 찢어져 남아 있지 아니하고, 마지막 장에는 상단에 4. 15.자 행사 내용만 기재되어 있는 채 그 아래부분은 여백이며, 둘째 장 다섯째 칸 ‘4.9. 4월 혁명 기념대회 준비’부분만 파란색 볼펜으로 기재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연필로 기재되어 있는 사실, 전민련 조직국 부장 김현수는, 전민련 상임의장 신창균 및 서울민협회장 최규성으로부터 업무일지를 찾으라는 지시를 받고 공소외 1의 책상 위 책꽂이에서 이를 찾아 피고인 및 김형민과 함께 살펴 보았는데, 파란색 펜으로 쓴 부분은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부장 정윤서도 전민련 사무실에 들렀다가 업무일지를 받아 위 최규성에게 전달해 주라는 부탁을 받아서 보았는데 연필로 써 있었다고 진술한 점에 비추어 원래의 업무일지인지 의심이 가고, 한편 전민련 사회국 부장 임무영은 제1심 법정에서 둘째 장 파란 글씨는 자신이 썼고 전민련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중 자신이 맡아서 한 일을 적어 놓은 것이라고 진술하였으나, 검찰에서 위 업무일지는 공식적인 장부가 아니라 공소외 1이 편의상 만들어 기재하여 왔기 때문에 그가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을 뿐 자신이 기록한 일은 없고, 그 둘째 장의 파란색 볼펜 글씨가 자신의 글씨체로 보이기는 하나 자신이 기재한 것인지, 언제, 왜 기재한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점, 또한 전민련 사회국 부장 이동진도 제1심 법정에서 첫째 장은 자신이 작성하였다고 진술하였지만, ‘업무일지를 본 일이 없어 작성 시기나 기간, 모양은 알 수 없고, 사회국업무진행표를 본 적이 없다는 진술서를 작성하여 제출한 사실이 있음’을 인정하는 취지로 진술하였고, ‘사회국 업무일지의 첫째 장 첫 부분을 기재 하였다면 그 업무일지를 동인이 처음 썼는가 아니면 그 앞의 부분을 누가 이미 작성하였는가, 증인이 기재할 때에도 첫째 장의 5분의 4 가량이 찢어져 없어졌는가’는 검사의 질문에는 “기억이 없다”고 진술한 점, 당초 위 업무일지가 전민련 사회국의 공식일지가 아니고 공소외 1의 개인적인 필요(전민련 사무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로 사용되던 것이라면, 이동진, 임무영이 그 일지에 어떤내용을 기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일 뿐더러, 위 일지의 기재내용은 1991.3. 20.부터 같은 해 4. 15.까지의 것이어서 이 사건 검찰조사시와 근접한 시기의 것이고 전민련에 관련된 행사들이므로 만일 동인들이 그 기재를 하였다면 위 행사내용과 대비하여 동인들이 기재한 이유를 쉽사리 떠올릴 수 있어서 이를 기억하지 못할리 없다고 보이는바, ‘ 공소외 1이 그 업무일지를 기재하는 것을 본 일은 없다’, ‘ 공소외 1의 필적을 잘 모른다’는 동인들의 진술까지 종합하면 위 업무일지의 첫째 장과 둘째 장의 파란글씨 부분에 관하여 동인들이 그 후 기억이 새롭게 되살아났다는 연유에 관한 합리적인 설명 없이 당초의 검찰 진술을 번복하여 위 필적이 동인들의 것이라거나 동인들이 기재한 것으로 단정적으로 진술하였다 하여도 이를 쉽사리 믿어 이 부분을 동인들이 각 기재한 것으로 단정할 수 없고, 피고인은 당초 위 업무일지를 본 일이 없다고 허위 진술하였다가 나중에 첫째 장과 둘째 장의 파란글씨 부분이 이동진과 임무영의 글씨 같다고만 하였으며, 이동진, 임무영이 제1심 법정에서 그 진술을 합리적인 이유없이 바꿨을 뿐인데도, 피고인과 그 변호인들은 이동진과 임무영이 위 부분들을 기재하였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전제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김형영 작성의 감정서 등을 공박하고 있는 점, 위 업무일지에는 뒤에 치룬 행사가 거꾸로 앞에 기재되어 있는 점, 위 김형영이 작성한 1991.5. 15.자 감정서의 기재 등에 의하여 위 업무일지의 일부 필적이 피고인의 필적이고 공소외 1의 필적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점들로 보아, 위 업무일지 역시 피고인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4) 메모지 (검사가 제출한 증 제7-2호)에 대하여

공소외 4의 검찰 제2회 진술에 의하면, 이는 공소외 1이 자기가 보기에도 잘 쓴 글이라고 생각된다며 읽어보라고 주었다는 것이고, 오히려 위 김형영이 작성한 1991. 5. 29.자 감정서 기재에 의하면 이 사건 수첩과 위 메모지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것이므로, 위 메모지는 공소외 1이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5) 피고인의 행적 및 진술에 대하여

공소외 4가공소외 1과 마지막으로 헤어져 집에 돌아온 날인 같은 달 7. 23:30경 참담한 심정으로 피고인에게 전화하였을 때 피고인은 “ 공소외 4야, 공소외 4야,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는 말을 세번이나 되풀이 한 사실, 피고인은 그 이유에 대하여 1991. 5. 5. 14:00경 공소외 3 집에서 공소외 3, 김진수, 공소외 4와 만났을 때 그 곳과 호프집, 포장마차에서 다음날 00:30경까지 늦도록 술을 마신 일이 있었기에 이를 사과한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으나, 그때 공소외 4 등에게 특별히 실수라고 할 만한 행동을 한 일이 없고 따라서 공소외 4도 그때 피고인이 어떤 실수를 하였다고 생각한 일이 없을 뿐더러 공소외 4가 이에 대해 어떤 언급을 한 일이 없는 사실, 공소외 4가 위와 같이 피고인에게 전화를 할 때, 공소외 1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집에 연락해 달라면서 공소외 1 부친댁 전화번호를 두 번이나 불러 주었는데도, 피고인은 그 후 이에 대해 전화번호를 불러 준 것은 맞는데 그것이 어디 전화번호인지 알지 못했고 따라서 그 전화번호를 적어 놓은 일도 없다고 검찰이래 진술하고 있는바, 공소외 4의 참담한 심정이나 공소외 1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의 집으로 연락해 달라는 취지로 보아, 같은 전민련 상근 근무자인 공소외 1에게 어떤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정을 쉽사리 간취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공소외 4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거나 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피고인은 그 다음 날인 같은 달 8. 아침 텔레비젼뉴스를 보고 공소외 1이 분신자살을 하였음을 알았다면서도 그 직후 공소외 3이 전화를 하여 공소외 1이 분신자살 하였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어본 데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 공소외 4는 물론 공소외 3도 그날 12:00까지는 고인의 유해가 안치된 연세대 영안실에 나와 있었는데도 피고인은 그날 14:00경에야 그곳에 나타나는 등 자살한 공소외 1과의 평소 친분관계에 비추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인 사실, 그리고 공소외 4가 같은 달 10. 15:00경 피고인을 찾아와 검찰에 출두할 경우의 진술 대책을 물어보자, 피고인은 “검찰에서는 말조심 하고, 예,아니오라고만 대답하고 쓸데없는 말이나 쓸데없는 사람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말하였고, 공소외 4의 수첩 (검사가 제출한 증 제7-1호)에 이미 사망한 공소외 1의 성명과 전화번호를 기재하여 둔 사실, 게다가 피고인과 김진수, 공소외 4, 공소외 3이 같은 달 12. 21:00경 종로 5가 도위취 호프집에서 만나, 김진수가 “내가 최덕수 등 분신사건 장례 등에 관여하였지만, 이번 일( 공소외 1 분신자살사건을 지칭하는 것)에 여자인 공소외 4를 개입시킨 것이 최대의 실수다”고 하자, 피고인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고 말한 사실, 피고인은 5. 5. 공소외 3 집에서 만난 날 공소외 4에게 “ 공소외 1이 좋은 사람이니 잘 사귀어 보라”고 말해놓고는, 분신자살 후인 5. 10.에는 동인에게 “ 공소외 1이 죽기 일주일 전쯤부터 공소외 1과 사이가 안 좋았다”고 모순되는 말까지 한 사실, 공소외 4가 같은 달 13. 검찰에 1차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3일 후 2차 소환되어 조사를 받게 되자, 피고인은 그 다음 날 어머니를 공소외 4의 집에 보내어 공소외 4의 어머니에게 “왜 변호사를 안 대느냐. 공소외 4가 얘기를 잘 하지 못하면 아들 입장이 난처해진다.”고 단순히 참고인에 지나지 않은 공소외 4를 위해 변호사 선임까지 하여 대응하도록 적극 권유한 사실, 피고인은 같은 달 18. 고 강경대군 장례행렬에 참가하였다가 그날 연대앞 로타리에서 일간지를 보고 자신이 공소외 1의 유서를 대필해 준 혐의를 받고 있음을 처음 알았다고 변명하는바, 그런데도 특별한 사유없이 같은 달 13.부터 귀가하지 않고 전민련사무실, 연세대학교, 명동성당에 머물러 있으면서 농성에 참여하고 기자회견을 하여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면서도 검찰의 소환이나 사전 발부된 구속영장의 집행을 거부해 오다가 한달이 넘은 같은 해 6. 26.에야 검찰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은 사실, 피고인은 위 업무일지를 본 일이 없다고 부인하였다가 그후 김형민의 진술에 의하여 피고인도 1991. 5. 10. 전민련 사무실에서 이를 본 일이 있음이 밝혀진 뒤에야 진술을 번복한 사실, 또한 피고인은 “양심과 명예를 걸고 결백하다”, “과학이 진실을 덮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임의성을 인정한 검찰진술에서는 “이 사건 수첩이 조작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이 사건 수첩, 업무일지, 이 사건 유서의 글씨는 모두 같아 보이는데 공소외 1의 글씨가 아니고 다른 한 사람의 글씨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 사건 유서, 업무일지,수첩의 글씨가 피고인이 작성한 진술서{검사가 제출한 증 제8-1호(서울지검북부지청 85형제43084호 기록에 편철된 것}의 몇가지 글씨와 똑같다고 인정할수 밖에 없다” “유서가 다른 사람에 의해 대필된 것은 명백하다”고 진술하였는바, 비록 위 진술들이 위 김형영의 감정서에 터잡은 검사의 신문에 대하여 이루어졌다 하여도, 자신이 무죄라는 입장을 확고하게 지키는 한 얼마든지 그 감정서 내용 대로 진술하지 아니할 수 있는데도, “위 필적들은 서로 같으나, 피고인이 이 사건 유서를 대필해 준 일은 없다”고 답변함은 모순일 뿐더러, 오히려 이 사건 유서 필적이 이 사건 수첩과 업무일지, 피고인이 작성한 위 진술서의 필적과 같다는 진술부분은 이 사건 감정서들의 감정결론과 일치함으로써 그 신빙성을 높여주는 자료가 될 수 있고, 그밖의 피고인의 행적이나 진술 취지 역시 이 사건 유서대필 사실에 관한 정황증거로 삼을 수 있다.

(6)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김형영이 작성한 감정서의 신빙성에 대하여

이 사건 감정서를 작성한 김형영과 공동심의에 참여한 같은 감정인 양후열은, 한결같이 최초의 감정의뢰와 관련된 추가감정의뢰가 있을 때에는 편의상 그 접수를 생략하고, 여러 건의 감정의뢰를 한 데 묶어 회보해 온 관례가 있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도 추가감정의뢰 중 일부 의뢰서에 대한 접수절차를 생략한 것이고,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일괄처리하면서 의뢰공문과의 대조번호 기재가 누락된 것일 뿐 의뢰한 사항에 대하여는 모두 회보가 되었으며, 검사가 제출한 증 제2-1호( 공소외 1이 작성한 주민등록증 분실신고서), 증 제3-1호(책표지 2장)와 이 사건 유서의 필적감정소견은 당초 대조자료 부족으로 일단 판정을 유보하였다가 추가자료의 현출로 대조자료가 충분해져서 공소외 1의 필적의 특징이 일관성 있게 나타났기에 이 사건 유서와 다른 필적으로 판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는바, 이 사건에서 변호인들이 주장하는 접수기재가 생략되었다는 흠은, 추가 관련된 여러 건의 감정의뢰 중의 하나이고 결국 감정의뢰사항에 대한 회보가 누락되었는지 여부는 의뢰기관과의 문제일 뿐이며, 감정방법을 부동문자로 처리하는 것은 업무의 증가에 능률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것임을 쉽사리 인정할 수 있으므로 위 사항의 여하만으로는 감정내용의 신빙성이 좌우되는 것은 아니므로 결국 문제는 그 감정내용의 신빙성에 귀착된다.

원래 필적은 물리학적 입장에서 볼 때 점과 선이 합쳐서 성립되는 것이고, 그 구성은 개인차에 의하여 천태만상으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이렇게 점과 선이 합친 대소의 형태에 개인의 특징이 현출되며, 필적감정은 이러한 고유의 특징을 발견하여 필적의 이동을 식별하는 것이나, 현재 그 필적감정의 정확성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결국 그 한계 내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이 보장되는 여러 가지 합당한 방법으로 감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바, 이 사건감정인 김형영이 뽑은 원심판결 첨부 별지 필적대조표의 희소성 있는 특징은 다른 사정이 없는 한 감정인의 감정경험 및 그 연구와 전문지식에 의하여 선정 제시된 것이고, 위 필적대조표에 나타난 필적을 보건대 비전문가가 보더라도 이 사건 유서와 피고인이 작성한 위 진술서의 필적은 일반인의 통상적인 필적과 달리 아주 독특하여 동일한 반면에, 이들과 공소외 1의 필적은 판이할 뿐더러, 앞에서 설시한 바와 같이 이 사건 수첩 등이 조작되었고 피고인 스스로 이 사건 유서의 필적 등이 피고인의 필적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이 이 사건 감정서의 신빙성을 보태주는 자료가 되는 점에서 이 사건 감정서는 신빙성이 있다.

이에 반하여 변호인들이 제출한 일본국인 오오니시 요시오의 감정서는 위 감정서와 다른 감정결과를 담고 있으나, 동인은 제1심 법정에서 진술한 바와같이 ‘ㄹ’ ‘ㅁ’ ‘ㅂ’과 같은 한글 자모를 알지 못하고 ‘ㅏ’와 ‘ㅣ’, ‘비’와 ‘버’, ‘자’와 ‘사’ 같은 평이한 글자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한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재일교포 4인의 도움을 받아 그들이 동일한 모음과 자음의 숫자를 세어 주고 동인들이 한글에 해서체와 행서체가 있다고 하므로 스스로는 잘 모르면서 이에 따랐다는 것일 뿐더러, 잘 알지도 못하는 ‘ㄹ’ ‘ㅁ’ ‘ㅂ’의 필법을 중점으로 감정하고 있는 점에서, 한글 필적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유사성과 희소성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없어 감정대상물에서 나타난 필적의 특징이 그 사람에만 고유한 희소성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이고, 원래 사본으로 필적을 감정하면 필기구의 종류나 복사기의 성능, 상태에 따라 필압의 형태나 필적의 미세한 특징이 잘 현출되지 아니하여 오류의 가능성이 있음을 자인하면서도, 이 사건 유서와 수첩 등을 사본으로 감정하고도 자신의 감정결과는 정확하다고 강조하고 있고, 또한 한글을 모르면서 일본 글자의 필적감정시간과 거의 같은 시간에 감정을 하였다는 점, 그리고 동인은 한글에서 자모가 정서체와 속필체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이 사건 유서 이외의 자료들(이 사건 수첩 이외에도 아래 변호인들이 제출한 숭의여전 메모, 방명록 노트 등)이 모두 공소외 1의 필적임을 움직일 수 없는 전제로 하여 감정한 점 등을 참작하면, 위 감정서는 감정인으로서의 기본능력과 감정의 기본조건을 결한 상태에서 작성한 것으로서 믿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

(7) 기타 증거에 대하여

증인 안혜정이 원심 법정에서 한 증언에 의하면, 동인은 공소외 1과 광탄중학교 동기 동창으로서 중학교 재학시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이고, 1985. 12.경 군에 입대하여 1988. 6.경 제대한 공소외 1로부터 군복무기간 중 10여통 이상 편지를 받았는데 공소외 1이 분신자살한 다음 날인 1991. 5. 9. 위 영안실에서 유서 사본 1장을 얻은 뒤 파주에 있는 친정집에 가서 찾아낸 공소외 1의 카드 및 편지(검사가 제출한 증 제13-1, 2호)와 대조해 보았으나 그 필적이 달라보여 그 후 이를 검찰에 제출하였는바, 위 김형영 작성의 감정서에 의하면 위 필적은 이 사건 유서의 필적과는 상이하다는 것이고 이는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다.

(8) 변호인들이 제출한 필적 관련 증거들에 관하여

(가) 증 제1호(방명록)은 대학노트에 방명록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것인데, 장기보존을 위한 방명록인데도 그 사연을 기재한 부분 두장이 모두 떨어져 있을 뿐더러, 위 방명록에 처음 사연을 기재하고 서명한 전현철의 진술에 의하면 그 방명록의 형상과 기재내용이 위 증 제1호와 다르다는 것이고, (나) 증제3호(전교조 원주지회 방명록)은 우선 공소외 1의 필적이라는 부분이 찢어져 첫 장에 핀으로 철해져 있고 필기구의 색깔이 곽대순의 검찰 진술과 다르며, (다) 증 제4-1, 2호(대유학보 원고 및 대유학보)중 대유학보에는 그 기고자 성명이 이용복으로 되어 있는데 대해 위 대유학보 원고에는 그 기고자 성명이 없는바, 이용복이 공소외 1임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을 뿐더러 도중에 다른 필적임이 분명한 원고도 끼워져 있고, (라) 증 제5호(숭의여전 메모)는, 이는 원래 1991. 5. 20. 저녁에 그 보관자들인 이보령, 민수진 등에 의하여 전민련측에 전달되었고 그 다음날 그들이 이에 관해 기자회견을 가졌음이 동인들의 진술로 보아 명백한데, 당시 이 사건 유서대필 문제를 둘러싸고 피고인측에게 자문하던 변호사들 중 한사람이 그들에 대한 검찰의 수사에 대비하여 일문일답식의 문답을 하면서 그들에게 위 증 제5호의 원본을 같은 달 21. 기자회견 후에 전민련에 전달한 것으로 하라고 지시함으로써 동인들은 처음 검찰진술에서 위와 같은 취지의 허위진술을 하였는바, 이 사건 유서의 대필 여부 및 이 사건 수첩의 조작 여부가 문제되는 이 사건에서는 위와 같은 원본전달시기의 조작은 결국 그 원본 존재의 신빙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아니할 수 없는 데다가, 이보령, 민수진 등은 당시 유서대필사건으로 화제가 된 때 이어서 위 메모를 찾았을 때 이를 유심히 보았으리라고 여겨지는데도, 각 그 진술서에서 원본이 뒤바뀌었을 가능성은 모른다거나 당초 복사해 둔 사본과 원본이 같은 것으로 믿고 있다는 투로 애매하게 진술하고 있고, (마) 증 제10호(방명록)는 장수가 다른 5묶음의 종이가 합쳐져 비정상적으로 제본된 것으로서 그 지질이 서로 다르고 제본상태도 정돈되어 있지 않으며, 앞뒤에 찢어진 부분이 있는 등 그 방명록 자체로 원래의 것인지 신빙성에 의심이 가고, (바) 증 제23-1호(각서)는, 그 소지자라는 한원석의 경위설명서(증 제23-2호)의 기재와 원심법정 진술이 서로 다를 뿐더러, 동인은 원심법정에서 금원을 대여한 사람과 공소외 1을 단지 소개하기만 하였다고 하면서 동인이 그 돈을 대위변제 하였다고 진술하고 있고, 이렇게 대위변제한 후 공소외 1의 채권자로부터 돌려받은 약속어음을 구상도 받지 않고 공소외 1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고 진술하는 한편, 그러고도 그 변제시각까지 위 각서에 명기해 꼭 변제를 받기로 하였다고 진술하고 있으나, 이는 모두 경험칙에 어긋나고, (바) 증 제20-1, 2(수첩 사본)은 이 사건 수첩이 조작된 후의 복사본으로 보아야 하며, (사) 그 밖의 증거들은 이 사건에서 피고인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음이 명백한 전민련측에서 뒤늦게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제출한 것들이거나 필체, 자수, 형식 등에 비추어 별다른 증거가치가 없는 것들이거나 그 필적 등이 유서 필적과 동일 또는 상이하다고 인정하기 어려운 것들일 뿐더러 원심이 인용한 위 증거들과 어긋나므로 이를 이 사건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

(9) 위와 같은 증거들 및 인정사실에 의하면, 피고인은 제1심이 인정한 바와 같이 공소외 1이 자살하려는 정을 알고 이 사건 유서를 대필해 준 사실과 그후 그 사실을 은폐하려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나.  기록을 정사하건대, 원심의 이러한 사실인정 및 이에 터잡은 판단은 모두 옳고, 거기에 소론과 같은 위법은 없으므로, 논지들 역시 이유 없다.

3.  피고인의 상고이유 제2점 및 그 변호인들의 상고이유 제3점에 대하여

원심은, 피고인이 ‘혁명의 불꽃’이라는 단체에 가입하고 제1심 판시와 같은 서적과 유인물들을 소지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고, 그 설시 증거들에 의하면, 위 단체는, 현 정부를 ‘미, 일 제국주의 자본의 강도적 약탈과 소수 독점재벌의 무한한 이윤을 보장하기 위한 제국주의 무리와 독점 자본가놈들의 민중에 대한 파쇼적 억압과 착취의 도구’로서, 제반 ‘파쇼적 악법’과 ‘권력기구’ ‘수탈적인 조세제도’ 등을 통하여 민중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고 있어 타도하여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의회주의적 방식, 점진적 교체의 방식으로는 그 타도가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그 타도의 방법론으로서 노동자, 농민, 도시 소자산가 등 모든 민중이 단결하여 무장봉기에 의한 임시혁명정부의 구성을 제시하면서 군대 및 경찰의 해체와 혁명군 창설, 자본 몰수와국유화를 통한 민중적 민족경제의 수립 등을 이루어 공산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 민중공화국을 수립하고 북한과 연방제 통일을 이루려는 것을 조직강령으로 하고 있고, 피고인이 소지한 유인물 등은 그러한 민중혁명을 명시적 묵시적으로 선전, 선동하는 내용임을 인정할 수 있는바, 이는 헌법이 전혀 상정하지 아니하는 혁명적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하여 헌법체계와 양립할 수 없는 공산주의 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 것이므로, 비록 북한이 대한민국과 함께 국제연합에 동시 가입하였다거나 그 사이에 ‘화해와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 발효되었다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이 그 규범력을 상실하였다고 할 수 없을 뿐더러, 그 공범들에 대한 형사 제재가 이미 종료되었다 하여 그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이 사건에서는 이 부분 공소제기가 부당하다고 볼 수 없으니, 결국 피고인의 위와 같은 행위에 가벌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는바, 원심의 이러한 판단도 옳고, 이와 반대의 견해에서 원심판결을 비난하는 논지 또한 이유 없다.

4.  이에 상고를 기각하고 상고 후의 구금일수 중 43일을 원심판결의 징역형에 산입하기로 관여 법관의 의견이 일치되어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법관 김상원(재판장) 박우동 윤영철 박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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